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정무/지도자 경력 (문단 편집) == [[스카우트|허카우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ax1whir.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J5CRwJsCByE)]}}} || 재능 있는 선수를 발굴하거나 키워내는데 탁월한 지도자이다. [[거스 히딩크]] 부임 직전의 국가대표팀 명단. 단 이 경기는 허정무가 사퇴한 이후 치러진 경기로, 당시 경기를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차기 대표팀의 수석코치로 내정된 감독대행 [[박항서]]였다. 거스 히딩크가 발굴했다고 알려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 선수 대부분이 이미 국가대표 엔트리에 포함되어있다. 2002 한일 월드컵 출전 선수 중 상당 수는 1999~2000년 대표팀 감독 부임 시절에 선발한 선수들이다. 송종국, 박지성, 이영표, 김남일, 이을용, 안정환, 이천수 등... 차두리, 윤정환 정도를 제외하고 2002션 한일 월드컵 당시 월드컵에 첫 출전한 선수들은 대부분 허정무가 국가대표에 처음으로 소집했다.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둘째치고라도 허정무 감독의 선수의 기량과 잠재력을 알아보는 안목만큼은 뛰어나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스카우트]]를 덧붙인 '''허카우터'''. 한정된 자원과 환경 속에서 성적을 내야 하는 클럽팁보다 어느 정도 원하는 대로 팀을 꾸릴 수 있는 국가대표 감독에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선수 수급의 원활함은 클럽팀이 훨씬 더 용이하다. 기본적으로 특정 국적만 대상이 되고, 소속팀과 일정을 맞춰야하며 선수가 부상이라도 당할 경우 걸맞은 대체인력조차 거의 없다시피한게 대표팀이다. 따라서 소집과 스쿼드 구성의 난이도는 대표팀이 훨씬 더 어렵다.] 허정무가 발굴한 선수들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박지성]]: 당시 박지성은 연령별 대표팀은 커녕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2군 입단 테스트에 떨어지고 불러 주는 대학이 없어서 [[명지대학교]]에 겨우 들어간 미드필더[* 심지어 명지대에서도 후순위로 뽑힌 선수였기에 연습 경기조차도 뛸 기회가 없었다고 본인이 방송(KBS 대화의 희열)에서 밝힌 바 있다. 다행히 명지대 축구부 감독 김희태가 묵묵히 연습하던 그의 성실성을 높히 평가해 연습경기에 윙백으로 출전시켰고 이를 본 허정무의 눈에 들었던 것.]였지만 허정무가 올림픽 대표로 뽑았다. 무명 선수의 깜짝 발탁이라 언론에선 명지대학교 감독 김희태와 허정무의 친분 관계를 놓고 바둑내기해서 허정무가 지는 바람에 박지성을 뽑았다는 루머가 돌았고, 추후에 직접 해명하는 지경에 이른다. 박지성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올림픽 대표팀과 명지대 축구부가 친선 경기를 했는데, 70여m를 혼자 드리블을 하며 5명을 제친 뒤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는 모습을 허정무가 보는 앞에서 보여주었다고 한다. 본인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는데 상대가 알아서 비켜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이후 허정무는 나이 19세의 박지성을 A대표팀에도 데뷔시켰다. 그냥 고만고만한 백업 정도로 기용한 것도 아니고, 국가대표팀에 있어 월드컵 다음으로 중요도가 높은 대회인 [[AFC 아시안컵]]에서 '''주전으로 중용'''했다.[* 단, 국내에서도 아시안컵이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2002WC로 인해 축구대표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진 2004년대회부터이다. 2000년도 대회만 봐도 12개국이 3개조로 진행된 소규모 대회였다.] 이후 박지성은 거스 히딩크를 만나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유럽까지 진출했다.[* 대표팀의 구멍으로 제3자에게는 큰 비난을 들었으나 꾸준히 중용받으며 감독의 아들이 아니냐는 비아냥을 견디고 카타르 월드컵에서 맹활약 한 황인범과 비슷한 케이스.] * [[이영표]]: 올림픽 대표팀 시절부터 중용하여 3개월 만에 A대표팀에도 발탁했다. * [[이천수]]: 청소년 대표 소속이었는데, 올림픽 출전 전에 이동국 외에 스트라이커 부족을 느껴서, 과감히 발탁하여 올림픽에 출전시켰다. (그런 이천수가 올림픽에서는 고의성 있는 반칙으로 퇴장.[* 애둘러 표현하였으나 대놓고 말하면 상대방의 얼굴에 싸커킥을 차는 범죄 수준의 반칙이었다. 말디니의 뒷통수를 차는 정도는 애교로 보이는 수준.] 이후 절치부심 2002년 월드컵 출전.) * [[구자철]]: 당시 무명의 미드필더를 뽑았다고 욕을 많이 먹었다. * [[기성용]]: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처음 올린 것은 [[핌 베어벡]]이지만 일회성 선발에 그쳤고, A매치 데뷔시키고 붙박이 주전으로 밀어준 건 허정무였다. 당시 기성용은 무려 4살을 월반해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할 정도로 가능성을 널리 인정받긴 했지만 올림픽에서 기대에 못미치는 경기력을 보이며 '포텐은 있는데 성인 레벨에선 아직...'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 선수를 바로 A대표팀에 선발하고, 심지어 월드컵 가냐마냐가 달린 '''최종예선''' 무대에서 주전으로 중용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이청용]] 역시 대표팀 주전으로 자리잡으며 허정무는 [[양박쌍용]] 진용을 구축한다. 이외 이동국, 송종국, 설기현, 김정우, 염기훈, 이정수 모두 허정무가 올림픽 대표로 뽑아서 훈련시킨 이들이다. 특정 선수 몇명이 특출날 수는 있어도, 이렇게 여러명의 선수들이 동시에 좋은 활약을 펼쳤다는 것은 허정무의 선수 보는 안목과 적절한 코칭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대표팀 발탁뿐 아니라 클럽팀이나 유소년 육성기관인 용인시축구센터에서 선수를 키워낸 사례도 많다. * [[김주영(1988)|김주영]]: '''허카우터로 알려지게 된 가장 큰 계기.''' 유스 시절 공격수로 테스트보러 온 김주영을 보고 '''"공격수로 계속 뛰면 대학도 못 간다, 하지만 수비수라면 국가대표까지도 가능하다."'''고 평가하며 포지션 변경을 종용했는데, 그 이후 실제로 김주영이 K리그의 대표적인 수비수로 성장하고, 국가대표로도 뛰었다.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621n06964?mid=s1001&isq=3486|#]][* 다만 2017년 러시아와의 평가전에서 자책골을 두개를 넣은 이후로 대표팀과 멀어졌다.] * [[김보경(축구선수)|김보경]]: 김보경을 처음으로 대표팀으로 부른 이가 허정무였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a_match&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514606|허정무 "꼬마 김보경, 죽기살기 몸싸움하던 독종"]] * [[정인환]]: 정인환은 용인유소년축구센터(백암고) 시절 허정무가 조련한 인연으로, 후에 허정무가 [[전남 드래곤즈]],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재직 중에 영입했다. * [[곽태휘]]: 허정무가 전남 감독으로 있었을 때 수준급 센터백으로 성장했다. 08년 2월 A매치에서 07년 7월 이후 득점이 없던 국가대표팀의 골가뭄을 해결하며 이후 허정무호 국가대표팀의 주전수비수로 성장하게 된다.[* 다만 월드컵 직전 부상으로 인해 남아공월드컵 직전 하차.] * [[한교원]]: [[조선이공대학]]이라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했지만 허정무의 눈에 들어 데뷔 시즌부터 주전으로 뛰고 기량이 발전되어 국가대표팀까지 진출했다. * [[김신욱]]: 김신욱을 국가대표팀으로 처음 발탁했다. 2007년 당시 청소년대표였던 [[윤빛가람]]을 보고는 '재능이 있긴 한데 그리 특출나지는 않은 것 같다'는 발언을 했는데, 2012년 윤빛가람의 기량이 저하되자 재조명되기도 했다.[* 2011년 아시안컵 이란전에서 환상적인 중거리슛으로 이란전을 승리로 이끌때까지만 해도 큰 기대를 받았지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 대표팀에 많이 소집되지 못했다.하지만 그 이후 ACL MVP도 타는 등 비록 대표팀과는 멀어졌지만 아시아에선 수준급 중앙 미드필더로 우뚝 서는 등 인정받는 미드필더가 되었다.] 또한 2019년에는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단점인 느린 주력은 고치기 힘들다 평가 받던 [[이강인]]에 대해 오히려 '''"스피드는 늘릴 수 있다. 최고 속도가 크게 성장하긴 힘들지라도 순간 민첩성을 향상시키면 스피드가 충분히 빨라질 것."'''라고 진단했는데, 이후 22-23 시즌 [[RCD 마요르카]]에서 이강인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면서 민첩성이 크게 증가한 모습을 드러내자, 허정무의 안목이 다시금 재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런 능력 때문에 [[축빠]]들은 허정무가 감독보다는 유소년 육성에 전념하거나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맡길 바라고, 다른 건 비난해도 선수보는 눈은 국내 최고 수준으로 추앙한다. [[FC 코리아]]는 허정무의 업적을 선수빨이라고 폄하하지만, 사실 그 선수빨은 스스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허정무는 2014 브라질 월드컵 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허카우터'라는 별명을 처음 듣는다고 했다.[[http://www.ddanzi.com/index.php?mid=ddanziNews&search_target=title&search_keyword=%ED%97%88%EC%A0%95%EB%AC%B4&document_srl=2526116|##]] 클럽을 맡으면 유망주는 샘솟고 전술적으론 안정되지만 왠지 모르게 비기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과도한 훈련으로 성적이 조금씩 내려가는 경향이 있었지만 허정무가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그 유망주 파워로 부임 전보다 성적이 올라가는 괴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후 대전의 대표이사 부임 후에는 '''[[배준호]]'''라는 걸출한 신인을 직접 공들여 데려와 유럽에 진출시키면서 선수보는 안목이 죽지 않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각주] [[분류:허정무]][[분류:대한민국의 축구 감독/경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